역사는 단 하나의 렌즈로 담아낼 수 없는 거대한 만화경과 같다. 바라보는 각도와 빛의 굴절에 따라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침략자가 되기도 하고, 한 국가의 찬란한 태양이 이웃 국가에는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재앙의 불길이 되기도 한다. 동아시아 근대사의 한복판에 서 있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이토록 극명한 역사의 이중성을 가장 뼈저리게 증명하는 인물이다.
한국인에게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만큼이나 깊은 각인을 남긴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이자, 안중근 의사의 서늘한 총구 끝에 맺혔던 제국주의의 흉터이다. 반면,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무너져 가는 막부의 잔해 위에 근대 국가의 뼈대를 세운 개국 공신이자 최초의 내각총리대신으로 추앙받는다. 이 글은 한 인물을 향한 극단적인 두 개의 시선을 전제로, 역사의 파도 속에서 그가 남긴 족적과 그 이면에 숨겨진 그림자를 문학적 사유를 통해 더듬어 보고자 한다.
청춘의 풍랑과 개화의 여명
소설 『료마가 가다』의 한 페이지에서 마주하는 젊은 날의 이토는 제국의 무거운 수레바퀴를 굴리는 노련한 정치가의 모습이 아니다. 그는 천하의 바람둥이로 불릴 만큼 자유분방했고, 낡은 시대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난잡한 사생활이라는 오점 뒤에는, 다가오는 서구 열강의 거대한 파도를 직감하고 일찍이 영국으로 건너가 근대의 빛을 목도한 '개화 지식인'의 예리한 통찰이 숨 쉬고 있었다.
사카모토 료마와 같은 시대의 선각자들은 이 거친 청년의 내면에 자리한 가능성을 꿰뚫어 보았고, 그를 역사의 무대로 이끌어 통제하고 조율했다. 야마구치현의 한미한 출신이었던 그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이른바 '조슈 3존'으로 불리며 서서히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갔다. 바람에 흔들리던 청춘의 돛은 어느새 일본이라는 거대한 배를 근대라는 미지의 바다로 이끄는 조타륜을 쥐게 된 것이다.
제국의 설계자, 메이지의 영광과 모순
이토 히로부미의 삶은 곧 일본 제국주의의 성장 서사 그 자체였다. 그는 메이지 유신을 이끈 주역으로서, 대일본제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고 의원내각제와 양원제 의회 제도를 확립하며 일본 민법의 초석을 다졌다. 행정부와 입법부의 기틀이 모두 그의 손끝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85년, 만 44세라는 일본 역사상 최연소의 나이로 초대 내각총리대신에 오른 그는 무려 4번의 총리직을 역임하며 7년 6개월이라는 긴 세월 동안 제국의 권력을 호령했다. 정치, 법, 황실의 제도를 정비하며 19세기 독일을 벤치마킹하여 제국대학을 설립하는 등, 일본의 물질적이고 제도적인 근대화는 그의 쉼 없는 행보 속에서 완성되어 갔다.
그러나 그가 설계한 제국의 뼈대에는 치명적인 독이 스며 있었다.
이토가 꿈꾸었던 독일식 입헌군주제는 겉보기에는 근대적 법치주의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실상은 헌법 위에 '천황'이라는 절대적 존재를 군림하게 만든 기형적인 체제였다. 천황의 권력을 제한하는 조항은 부재했고, 그 절대적 권위는 삿초 번벌 출신의 원로들과 총리에게 위임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둔갑했다. 민중의 피땀으로 수립된 의회는 행정부의 독주를 견제할 힘을 잃었다. 외형적인 근대화는 이루었을지언정, 민중의 이해를 배제하고 지배층의 안위만을 위해 설계된 이 모순적 체제는 훗날 군부의 무자비한 폭주와 의회 정치의 철저한 붕괴를 잉태하는 불씨가 되었다. 진정한 의미의 '정신적 근대화'는 이룩하지 못한 절반의 성공이자, 파멸의 서곡이었다.
침략의 흑막, 엇갈린 운명의 교차로
바다 건너 이웃 나라의 렌즈로 바라본 이토는 철저한 '파괴자'였다. 한국인들에게 '이등박문(伊藤博文)'이라는 이름은 일본의 초대 총리라는 직함보다, 을사조약을 강제하고 대한제국의 숨통을 끊어놓은 침략의 원흉으로 뼛속 깊이 각인되어 있다. 1906년부터 1909년까지 초대 한국통감으로서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 군림한 그는 무력과 기만으로 한 국가의 주권을 유린했다. 대중적인 악명이 어찌나 깊은지, '이토'라는 흔한 성씨를 가진 현대의 일본인조차 혈연적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만큼 그가 남긴 상처는 세기를 넘어 짙게 배어 있다.
일본 내 일부 학자들은 그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개전에 반대하고 조급한 한일병합을 만류했던 '온건파'였다고 항변한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같은 골수 천황주의 군부 강경파들과 대립하며 가급적 전쟁을 억제하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침략자의 '속도 조절'은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는다. 온건이든 강경이든, 그의 최종 목적지가 대한제국의 식민지화였음은 변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이다. 우아한 외교관의 미소 뒤에는 결국 이웃 나라의 주권을 집어삼키려는 제국주의자의 날카로운 이빨이 숨겨져 있었다.
하얼빈의 총성, 역사가 낳은 지독한 아이러니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울려 퍼진 안중근 의사의 총성은 동아시아의 운명을 가른 서늘한 메아리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비참한 최후는 역사가 빚어낸 가장 지독한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당시 일본 군부는 이토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대륙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며 즉각적인 한반도 병합을 원했던 강경파들에게, 사사건건 속도를 늦추며 천천히 가자고 제동을 거는 이토는 언젠가 제거해야 할 방해물이었다. 거물급 인사의 행차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하얼빈역의 경비는 일본군보다 러시아군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 만큼 허술했다. 이 때문에 군부가 암살을 고의로 방치했거나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묵인설마저 역사적 정황 속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군부의 훼방 속에서 권력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질 운명이었던 노련한 정치가가, 적국의 청년이 쏜 총탄에 쓰러짐으로써 일본 내에서 영원한 '순국 영웅'으로 부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토의 죽음은 단지 한 영웅의 탄생과 몰락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치적 온건파이자 마지막 제동 장치였던 그가 사라지자, 일본의 급진적인 군국주의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폭주하기 시작했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제국주의의 기관차는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파멸의 낭떠러지를 향해 돌진했고, 일본 스스로도 패망이라는 잿더미를 뒤집어써야만 했다.
그림자가 되어버린 제국의 빛
이토 히로부미. 그는 분명 조그만 섬나라 일본을 근대 국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탁월한 설계자였으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룬 메이지 시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철저히 타국의 희생을 딛고 쌓아 올린 핏빛 모래성이었다.
국내적으로는 민중을 소외시킨 위로부터의 권위주의적 개혁이었고, 대외적으로는 약소국을 짓밟는 야만적인 제국주의의 팽창이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이다. 일본 근대화의 눈부신 빛을 뿜어내던 그는, 한반도에는 가장 짙고 참혹한 어둠을 드리운 장본인이었다.
역사는 그를 영웅과 원수라는 두 가지 이름으로 동시에 부른다. 우리가 이토 히로부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를 증오하기 위함이 아니다. 개인의 탁월한 능력이 보편적 인류애와 도덕적 기반을 결여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거대하고 폭력적인 괴물이 되어 세계를 유린할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가장 생생한 반면교사이기 때문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두 개의 거울에 비친 그의 일그러진 초상은 동아시아가 품고 있는 끝나지 않은 역사의 질문으로 남아 있다.
.빛나사역사연구소 소장
김준권 문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