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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읍 권포리(權布里)

③ 운봉읍 권포리(權布里).

본래 운봉의 서면 지역으로 굄피기 또는 권포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가동, 연동, 임리의 각 일부를 병합해 권포리라 하고 남원군 운봉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3월 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운봉읍 권포리가 됐다. 권포리에는 권포, 가동 등이 있다.

위성사진

권포(權布)마을

고려말 우왕 6년(1380) 현재 마을의 서편 200m지점 고남산 아래 동면에 근거지를 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이성계 장군이 고남산에서 전승기도를 올릴 때 주둔한 병마의 식수로 쓰던 샘 주변에 10여호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성씨는 미상이다.

그후 고남산에 큰 산사태가 일어나 매몰괴고 1500년경에 현 위치에 권씨들이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었다.

고남산은 이성계장군이 왕업을 이룬것과 연관이 있다하여 일명 태조봉, 제왕봉이라 하였으며 제왕봉이라 하면 모든 산의 제왕이 되므로 이러한 지형을 살리기 위해서는 마을 이름이 권력을 편다는 의미를 상징해야 된다며 정도전이 마을 이름을 권포(權佈)로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권씨들이 널리 퍼졌다는 의미로 권포(權布)가 되었다고 하는데 본래 이름은 굄피기다.

위치는 운봉읍 소재지로부터 국도 24호선에서 군도 8호선 2km지점 고나산 기슭에 위치하고 산동면 부절리와 인접해 있다. 주민은 82세대, 183명(남자 86명, 여자 97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상추를 특산물로 생산하고 있다.

가동마을

가동(加洞)마을

1710년경 함양구 뇌산 마을의 삼언 최씨가 지금의 마을 서쪽 막골에 막을 치고 살기 시작한 뒤 이인좌의 난을 피해 김해 김씨가 들어와 함께 마을을 일구었다고도 하고, 조선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무신난)때 향양(옛 곤지군)을 점거한 반란군이 하냥 군수로 내세운 전주 최씨 최존서를 운봉 좌영군이 함양을 공격하여 물리치고 난을 평정하자 그 친족들이 난을 피해 막골로 들어와 막을 치고 처음 살게 되었다고 하여 막골(마골)로 부르다 덤몰(덧골)로 바뀌었는데 이 마을이 권포리와 장교리(연동) 두 큰 마을 사이에 새로 생긴 마을, 즉 연동에서 더 가면 나오는 마을, 또는 덤으로 붙은 마을이란 뜻으로 속칭 ‘덧골’, ‘덤몰’ 이라 부르던 것을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가동(加洞)이 되었다.

주민은 39세대, 57명(남자 26명, 여자 31명)이다.

* 이인좌의 난

1728년(영조 4)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한 사건. 이인좌가 거병했으므로 '이인좌의 난'이라 하며, 무신년(戊申年)에 발생했으므로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고남산

고남산과 전설

이성계 장군과 고남산 제단

고남산은 산동면 부절리와 운봉읍 권포리와의 경계에 위치한 해발 846m로 산 정상에는 제단이 하나 쌓여 있는데 고려말 1379년(우왕 5년) 9월 동면 인월리에 집결하고 있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이성계 장군이 기도를 올린 곳이다.

당시 이성계 장군은 적정을 살피니 적장 아지발도란 자가 싸움마다 앞장서서 승리를 과시한다 하니 섣불리 공격치 못하고 적을 물리치기 위한 책략을 궁리한 끝에 영지를 골라 승전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리기로 하고 운봉고지에 오르니 고남산이 적격이라 먼저 천하대장군이라 쓴 방목 두쌍을 만들어 동쪽과 서쪽에 한쌍씩 세우고 돌을 다듬어 제단을 쌓고, 몸소 제복을 입고 팔도산신을 불러 왜구의 섬멸과 필승을 기원하는 7일 기도를 올렸다.

이후 이성계 장군은 동두란과 함께 황산싸움에서 아지발도를 사살하고 서울로 향하던 왜구의 사기를 꺽어 그 유명한 황산대첩을 이루었다.

권포마을

지금도 봉락골 어딘가 엔 여덟 마리의 봉황이 날아 내린 명당이 숨어있다?

고남산을 마주 바라보면 제단을 쌓은 고남산 정상이 마치 감투를 쓴 것처럼 보인다.

서쪽으로 동학혁명 당시 남원에서 진격해 오는 동학군과 운봉 민보군이 큰 전투가 있었던 관음치와 고남산성 동쪽으로 통하는 통안재가 있어 이 두 고개는 과거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산동면 부절리와 월석리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 역할을 하였다.

또한 통안제 북동쪽에 위치한 봉낙골은 경주 정씨(慶州鄭氏) 선산이 있는 곳으로 근동에서 보기드문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마을 남쪽 1km 지점의 팔봉(八鳳)에는 여덟 곳의 명당이 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후 이 말을 믿는 많은 도사와 일반 사람들이 8명당을 찾아 헤매었으나 아무도 그 혈(穴)찾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명당의 지기가 다하였는지 그 여덟 명당자리에서 봉(鳳) 여덟마리가 한꺼번에 날아올라 북쪽을 향해 날더니 상사바위 뒤쪽에 내려 앉았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명당자리가 옮겨온 것이라며 이곳을 봉락골이라 불렀다. 지금도 봉락골 어딘가에 8개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진다.

주요시설

운상원소리터

운상원소리터

거문고 명인 김무길씨가 2001년 남원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폐교된 고남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 건문고산조 전수관을 만들었다. 매년 전국 악성 옥보고 거문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