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10 (목)

  • 구름많음동두천 27.7℃
  • 흐림강릉 29.4℃
  • 구름조금서울 29.1℃
  • 구름조금대전 30.2℃
  • 맑음대구 32.3℃
  • 연무울산 29.4℃
  • 맑음광주 31.6℃
  • 구름조금부산 26.6℃
  • 구름조금고창 32.1℃
  • 맑음제주 29.6℃
  • 흐림강화 26.9℃
  • 구름많음보은 28.2℃
  • 구름조금금산 30.3℃
  • 구름많음강진군 30.8℃
  • 구름조금경주시 32.9℃
  • 구름조금거제 28.1℃
기상청 제공
메뉴
후원하기

전 남원화림공업주식회사 심재명 회장 별세<16면>

"고인은 떠났지만 그의 고향사랑은 후세에 남을 것"
日 기업인으로 성공, 고향으로 돌아와 이웃돕기, 장학사업 앞장

“심재명 선생이 그동안 펼쳐 오신 선행들을 널리 알리고 후세에 길이 귀감이 되도록 하자는 주생면민들의 뜻을 받들어서 오늘 공적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남원 제일의 명당지답게 훌륭한 지역출신 인물들이 많지만, 선생만큼 지역을 위해 유·무형의 공적을 가시적으로 많이 남기신 분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아울러 선생이 극구 사양하고 만류하였지만 면민들이 처음부터 한결같이 공적비 건립의 뜻을 모아줌으로써 그동안 망설임 없이 앞장설 수 있었다. 우리 세대는 물론 우리 후대들도 선생을 오래도록 기리고 본받기를 간절히 바란다”

-심재명 회장 공적비 건립때 발표된 추모문 中-

전 남원화림공업 설립자 심재명(90) 회장이 지난달 27일 새벽 4시 전북도립남원노인요양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심 전 회장은 어렵던 시절 화림공업을 통해 남원지역 경제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수많은 봉사활동으로 남원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고향인 주생면민들은 그동안의 공적을 기려 살아생전에 공적비를 세우고 그의 선행을 칭송했다.

□ 일본건너가 역경 딛고 자수성가

심 회장은 남원에 있어서 특별한 사람이었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남원시 주생면 정송리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심 회장은 주생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 23살 홀연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숱한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히로세·아이도루·세화·화림 등의 회사를 설립했다.

해방 뒤 징용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떠난 길이었지만 그 뒤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노력과 의지로 뜻을 세워 사업기반을 일궈나갔다. 그리고 끝내 기업인으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 됐다.

1967년 여성용 란제리 제조회사인 히로세(廣瀨)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한데 이어 세화(世和)공업주식회사 등 차례로 4개 회사를 설립, 모두 7개 공장을 세웠다. 일본 내 같은 업종의 250여개 업체에 대한 기업 평가에서 3년 연속 1위를 차지할 만큼 탄탄한 회사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심 회장은 멀리 두고 온 고향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 수많은 봉사로 남원발전에 기여

심 회장은 1988년에 남원 노암동에 화림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일본에서 40년간 일군 기업을 고향인 남원에 옮긴다는 소식에 모두들 만류했다고 한다. 까다로운 규제와 조건, 그리고 일본 정부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본 정부의 전문 감사기관으로부터 세무 조사를 당하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남원에 화림공업을 세웠고 4년 뒤엔 500만불탑을 세워 대통령상과 국세청장상, 노동부장관상 등을 받았다.

그가 고향에서 칭송을 받는 것은 지역경제에 미친 영향보다 남을 위해 베푼 봉사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는 남원에서 수없이 크고 작은 일을 해냈다. 불우이웃돕기는 물론 각종 장학사업을 펼쳤고 농촌돕기에도 앞장섰다.

남원경찰서에 체육관이 없어 무도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안타깝게 여겨 체육관을 지어 헌납했다.

그의 고향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일 민간교류로 이어졌다. 선진 문물을 익혀 지역과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자는 취지에서다.

화림공업의 사원뿐만 아니라 모범택시기사, 교육공무원, 학생 등 2,100여 명에게 일본 방문 기회를 부여했다.

그는 당시 학생들에게 “왜 일본이 우리보다 잘 사는지 그 까닭을 깨우쳐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또 일본 관광객의 남원유치를 위한 홍보사절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 내에서 남원의 역사, 문화, 음식 등을 소개하며 관광 상품을 알렸다.

그는 "혼자만의 번영은 있을 수 없다. 진정한 번영은 남과 더불어 번영하는 공존공영에 있다"고 늘 강조해왔다고 한다.

이 밖에 자율방범대 차량구입, 학교 기자재 지원, 아동 급식비와 장학금 지원 등 셀 수 없이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화림공업은 2000년도 중반에 경영성 악화로 문을 닫았다. 어쩔 수 없는 시대 상황이었다.

심 회장은 병상에 눕기 전인 올해 봄까지 27년간을 남원에서 일본을 오가며 생활했다.

그는 생전에 주로 지인들과 조찬회동을 하며 광한루원 추어향에서 소고기무국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지역 후배들이 알아보며 인사라도 할라치면 “오! 젊은이” 하며 반겼다는 심재명 회장. 그는 이제 고향인 주생 정송 반송마을 선영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