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뉴스를 보고,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또 경선 끝난 뒤 지역분위기를 보면서 마음이 많이 허망합니다. 저는 거창한 이념을 아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하게 살아오면서 민주당이라는 이름하나 믿고 투표해왔던 시민 중 한 사람입니다. 못살던 시절에도, 억울한 사람 편에 서줄거라 믿었고, 그래도 민주당은 서민과 약자의 목소리를 외면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이번 (민주당 남원시장) 경선은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누가 이기고 지는 게 문제보다는 그 과정 속에서 보여준 모습들이 너무 낯설고 차갑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같은 당 안에서도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고, 응원하는 후보가 다를 수도 있는 건 당연한 일인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보다 “누구 편이냐”부터 따지는 분위기가 되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조금만 다른 목소리를 내도 배신자 취급하고, 멀리하고, 눈치주고, 심지어 사람 자체를 적처럼 대하는 모습을 보며 정말 많은 시민들이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이번 일을 겪으며 “우리가 원했던 정치가 이런 것이었나” 하는 허탈함을 처음 느꼈습니다. 정치는 원래 싸우는 거라고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전하는 5월, 그러나 우리가 외면해선 안 될 또 하나의 현실이 있다. 바로 가정폭력이다. 따뜻한 햇살과 카네이션 향기가 가득한 5월 8일은 어버이날이다. 우리는 부모님의 헌신과 사랑을 떠올리며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하지만 같은 공간, 같은 “가정”안에서 누군가는 여전히 말하지 못할 아픔 속에 살아가고 있다. 가정은 가장 편안해야 할 곳이며, 가장 안전해야할 곳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를 지켜주는 울타리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폭력은 그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폭력은 단순한 다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존엄을 무너뜨리고, 삶 전체를 흔드는 심각한 범죄이다. “가족이닌까 괜찮다“ ”참으면 지나간다“는 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침묵은 폭력을 키우고 방관은 또 다른 피해를 낳기도 한다. 어버이날을 맞이한 지금,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지켜주는 ”행동“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작은 관심이 한 사람을 살릴 수 있고, 한 번의 신고가 한 가정을 지킬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용기가 누군가에게 큰 희망이 되기도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탐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삶과 선택을 통해 과거를 성찰하고 현재를 진단하며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기 위함이다. 이른바 "과거는 미래의 스승이다"라는 말처럼,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이 정의이고 진실인지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하지만 인류는 종종 그 뼈아픈 교훈을 망각하곤 하며, 그 결과 3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혼란과 악순환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전근대 사회의 역사를 한 편의 연극에 비유한다면, 최고의 권력을 쥔 군주가 주연일 것이고 그를 보좌하는 신하들은 조연, 그리고 피지배층인 백성들은 무대의 배경이자 보조였을 것이다. 이상적인 국가라면 주연이 그 역할에 걸맞은 훌륭한 연기를 펼쳐야 마땅하나, 안타깝게도 역사 속 주연들은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바로 이때, 무대의 향방을 결정짓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이들이 바로 '조연'인 신하들이다. 이들 중 자신의 뚜렷한 색깔과 신념으로 올바른 역사의 족적을 남긴 이들을 우리는 '명신(名臣)'이라 부르며, 오직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국가와 민족을 파멸로 몰고 간 이들을 '간신(奸臣)'이라 부른다. 명신(名臣): 시대를 짊어진 고독한 등불
우리 사회는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수많은 갈등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웃간의 소음 문제, 금전거래 분쟁, 상가임대차 갈등, 아파트 층간 누수문제 등 크고 작은 민사적 분쟁은 일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법정으로까지 이어지면 시간과 비용 부담은 물론 감정의 골까지 깊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 시, 구, 군에 “민사분쟁 조정위원회”의 설치와 활성화는 매우 의미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정위원회는 당사자 간의 입장을 충분히 듣고, 법적 판단 이전에 상호 이해와 합의를 끌어내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판결이 아닌 “관계회복”이라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런한 사소한 분쟁으로 큰 범죄로 이어지는 사례도 있습니다. 공동주택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웃간의 사소한 갈등문제가 갈수록 많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웃간의 문제 해결은 공동체 사회에서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지역 단위에서 운영되는 조정위원회는 주민들의 생활 속 갈등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법원에 비해 절차가 간편하고 비용 부담이 적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무엇보
핏빛 연대기 위에 각인된 평화의 비문: 전쟁, 그 야만의 궤적과 이성의 응시 30년 전, 대학 강단의 공기 속을 떠돌다 빛바랜 노트 위에 정박했던 '전쟁론'의 묵직한 활자들은, 오늘날 섬뜩하리만치 생생한 현실의 비명으로 되살아나 우리의 양심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인류는 끝없이 이성의 진보와 문명의 승리를 찬양해 왔고, 하늘에는 인공위성이 별처럼 떠 있으며, 손끝으로는 전 지구적 연결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창밖의 세계는 여전히 참호 속의 진흙탕과 핏빛 야만의 변주곡을 반복하는 중입니다. 고도화된 기술은 인간을 폭력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이 아니라, 살육의 도구를 더욱 정교하고 무감각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지금 중동의 붉은 모래바람 속에서 벌어지는 참상은 결코 신의 이름을 빌린 낭만적인 서사시나 선과 악의 명징한 성전(聖戰)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의 질서를 자신의 손아귀에 쥐려는 미국의 신패권주의라는 차가운 강철과, 교리의 절대성을 수호하려는 이란의 신정정치라는 맹목적 불꽃이 정면으로 충돌한 철저한 힘의 수라장입니다. 짙은 화약 연기 너머로 최후의 승전보를 울릴 자는 누구인지 역사는 아직 침묵하고 있으나, 이 무자비한 충돌이 빚어낸 서늘한 경제 침
"태초에 암살이 있었다. 카인은 돌을 들어 아우 아벨의 머리를 내려쳤다." 인류의 기록이 시작된 창세기의 첫 페이지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신의 은총을 독점한 아우를 향한 형의 질투는 인류 최초의 살인, 즉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암살을 잉태했다. 타인의 가슴에 총구를 겨누거나 비수를 꽂는 행위의 이면에는 저마다의 처절한 사연이 숨 쉬고 있겠지만, 그 칼끝이 향하는 궁극적인 지향점은 언제나 '탈취(奪取)'다. 대상이 소유한 생명, 그리고 그 생명이 쥐고 있는 무형의 권력을 빼앗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권력의 깎아지른 정점에 서 있는 국가원수는, 역사의 매 순간 가장 매혹적이고도 위태로운 암살의 표적이 되어왔다. 이 글은 한 자루의 단검과 한 발의 총성이 어떻게 제국의 운명을 가르고 시대의 물줄기를 틀어놓았는지, 저 짙은 어둠 속에서 작동해 온 '암살'이라는 극단적 정치 행위의 맨얼굴을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어둠 속의 이단자들: 하시신과 암살의 본질 프랑스어 ‘assassina’와 영어 ‘assassination’이라는 단어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11세기 말 페르시아의 황량한 산악 지대에 가닿는다. 그곳에서 하산 사바바는 소수의 정예 부대를 규합해 '아사신
1985년의 서랍, 잃어버린 활자와 지워지지 않는 기억 기억의 갈피를 더듬어 올라가면 1985년의 어느 날에 닿는다. 아직 세상이 군부의 서슬 퍼런 침묵 속에 웅크리고 있던 그 시절, 대학 학보사에서 활동하던 고등학교 후배로부터 한 편의 글을 부탁받았다. 서가에 꽂힌 낡은 자료들을 뒤적이고, 신문 기사와 소설, 흩어진 논문들의 파편을 모아 며칠 밤을 지새우며 써 내려간 글의 제목은 '4·3 운동'이었다. 국가폭력의 거대한 그림자 속에 숨죽여야 했던 금기의 역사를 활자로 매듭지으며, 활자 하나하나에 무거운 부채감을 담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세월이 흘러 그때의 학보를 찾으려 집안 곳곳을 뒤졌으나, 결국 그 빛바랜 종이 무더기는 어디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제법 정성 들여 벼려낸 글이었기에 아쉬움은 짙게 남았다. 하지만 종이 위의 활자는 사라졌을지언정, 그때 제주라는 섬이 품고 있던 거대한 비극을 처음 활공하듯 내려다보며 느꼈던 전율과 슬픔은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화인(火印)처럼 찍혀 있다. 문학, 굳게 닫힌 역사의 봉인을 뜯다 역사의 진실은 때로 건조한 기록보다 한 편의 문학을 통해 더욱 날카롭게 심장을 파고든다. 내게 제주의 아픔을 가장
포도밭 바람결에 실려 온 1500년의 제국남원 유곡리·두락리에서 가야를 읽다 김해 김씨, 부산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옛 가야를 걷는 이나는 부산 사람이다. 낙동강 하구의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일상이 된 곳, 귓가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태어나고 자랐다. 그런 내가 가야(加耶)라는 이름에 깊이 이끌리는 것은 어쩌면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일지도 모른다. 나의 본관이 김해(金海)이며, 금관가야의 문을 연 김수로왕의 74세손이라는 혈연적 기원 때문만은 아니다. 발길 닿는 영남의 흙 한 줌, 돌 한 덩이마다 묻어 있는 옛 가야인들의 짙은 숨결이 무의식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나를 호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문적 여정의 닻을 중국사라는 거대한 대륙에 내렸지만, 내 마음 한편에는 늘 해소되지 않는 짙은 아쉬움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한국 고대사를 전공했더라면, 일제강점기라는 뼈아픈 세월 속에 무참히 왜곡되고 잊힌 우리 옛 왕국들의 퍼즐을 내 손으로 맞출 수 있지 않았을까.’ 거대한 제국들의 흥망성쇠를 탐구하면서도, 식민 사관과 후대 사가들의 무관심 속에 반쪽짜리 역사로 전락해 버린 가야를 떠올릴 때면 그 망상 같은 아쉬움은 이내 뜨거운 학문적 갈증으로 변하곤
스크린 속의 빌런, 혹은 역사의 설계자 최근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가족들과 함께 관람했다. 이미 익숙한 역사적 줄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주는 긴장감과 몰입도는 대단했다. 흥행의 예감이 강하게 밀려오는 가운데, 나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인물은 주인공 엄흥도도, 비운의 단종도 아닌 바로 한명회였다. 그는 전형적인 ‘악역’이자 현대적 의미의 ‘빌런’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만난 한명회는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뜨렸다. 추하고 왜소한 책사가 아니라, 서늘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역사의 판을 짜는 거대한 설계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그를 '칠삭둥이'라 비하하며 그의 욕망을 뒤틀린 신체적 결함의 보상 심리로 치부하곤 했으나, 과연 그것이 그에 대한 공정한 평가일까. 남이의 칼끝에서 만난 권력의 비정함 내가 한명회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생 시절 읽었던 남이 장군의 전기였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기개 높은 무장 남이. 그러나 그는 유자광의 고변과 한명회, 신숙주 등의 공격을 받아 처형당하고 만다. 이것이 역사에 기록된 ‘남이의
1. 한 평의 정직함, 그 무거운 진리태양이 지평선을 넘어오기 전, 대지는 가장 정막하다. 그 고요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생의 밭’ 앞에 선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비옥하거나 혹은 척박한 땅을 부여받는다. 누군가는 그 땅의 넓이를 부러워하고, 누군가는 흙의 성분을 탓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성숙한 영혼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하나의 준엄한 물리 법칙을 체득한다. “한 평의 밭에서는 오직 한 평만큼의 수확만 거둘 수 있다.” 우리는 종종 행운이라는 이름의 소나기를 기다리거나, 수동적인 과신 속에서 내일의 풍요를 꿈꾼다. 그러나 우주의 시계는 요행에 맞추어 움직이지 않는다. 수확의 양은 밭의 크기가 아니라, 그 밭을 일구기 위해 구부린 허리의 각도와 손바닥의 굳은살 깊이에 정비례한다. 이 정직한 무게를 깨닫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미래는 결코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다. 전자는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쟁기를 잡고, 후자는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기우제의 제관으로 남는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는 결핍을 마주한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당신이 남보다 똑똑하지 않고 특별한 능력이 없다면, 그 결핍은 오직 노력을 통해 채울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