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조사를 하고 있는 김현식 남원문화원 사무국장. ▲김현식 남원문화원 사무국장 가족. 김현식 남원문화원 사무국장이 지역문화 연구 공로를 인정받아 장관상을 수상하게 됐다. 지난 9일 한국문화원연합회는 제33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수상작 10편을 공개했다. 김현식 사무국장은 ‘남원의 석불문화 석불 추적보고’를 출품해 지방문화원 향토문화연구실적 부문에서 최고인 최우수상(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에 선정됐다. 이번 공모전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국사편찬위원회와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후원했다. 공보부문은 △향토문화 논문·자료 △향토문화 콘텐츠 △향토문화수기 △지방문화원 향토문화 연구실적 등 4개 부문이다. 지난 8월 응모작을 접수 받아 9월부터 각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검증위원회와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받았다. 한편 향토문화콘텐츠와 수기 부문에서는 이종근 새전북신문 문화부 부국장이 ‘이삼만의 산광수색 창극 대본’으로 특별상(한국콘텐츠진흥원장상)을 수상하게 됐다.
나말여초에 조성한 신계리마애여래좌상에 이어 고려시대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는 사석리마애불좌상은 남원의 또 하나의 보물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친견하기 어려운 불상 중 하나이다. 남원시 대강면 사석리 약수정사 깊은 계곡 절골을 따라 올라가면 볼 수 있는데 이 마애불을 보기위해서 전국 각지에서 석불을 연구하거나 탐방하는 사람들이 수차례 탐사를 해야만 볼 수 있는 근엄한 부처님으로 유명하다. 먼저 마애불이 있는 곳은 삿갓봉을 지나 그럭재로 가는 길, 해발 555m인 두바리봉 서쪽 능선을 따라 면소재지 방향의 능선 따라 내려오다 해발 500m 지점 동남쪽 화강암 바위 면에 새겨져 있는데 면소재지에서 두바리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를 따라 가는 것이 경사가 심하긴 하지만 가장 접근성이 좋다. 우선 이 마애불의 높이는 전체 485cm이며 신장은 370cm로 고려시대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연석의 바위 면을 파내 상호에 비가 흘러내리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머리 부분이 신체에 비해 크고 얼굴은 도드라지게 양감을 주어 뚜렷하다. 소발 머리에 육계가 큼직하게 표현되었고 이마에 백호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머리와 이마의 경계가 일자형이며 가늘고 긴 눈과 오똑한 코, 짧은 인
옛사람들은 남원 서북쪽에 우뚝 솟은 교룡산을 북악이라 하였고 요천 승사교 건너 낮게 솟은 금암봉을 남악이라 하였다. 교룡산은 남성적 기품이 보이는 반면 금암봉은 여성적 부드러움이 풍긴다. 북악으로 일컬어졌던 교룡산은 흔히 남원의 객산이라는 예명을 달고 산다. 산 정상은 두 개의 봉우리가 높이 솟아있어 왼쪽은 복덕봉, 오른쪽은 밀덕봉이다. 복덕봉 남쪽 줄기를 따라 내려가면 대산면 금강마을로 이어지는데 마을 동쪽에 남원진씨의 탄생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 옥정(玉井)이 있다. 옛날, 금강마을에 아름다운 처녀가 살고 있었다. 햇볕이 따뜻한 어느 봄날, 바구니를 끼고 들에 나가 봄나물을 캐는데 목이 말라 참을 수가 없다. 다행히 인근에 오래전부터 석간수가 흘러나오는 샘을 찾아가는데 샘물 위에 판자를 띄우고 화려한 옷을 입은 동자(童子)가 놀고 있는 것이었다. 처녀는 이 기이한 현상에 숨을 죽이고 몰래 이를 지켜보다 자기도 모르게 샘으로 이끌려 다가섰고 이에 놀란 동자는 물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처녀는 화려한 동자가 물속으로 사라지자 아쉬움에 몸을 숨기고 숨을 죽이며 동자가 다시 나타나길 기다렸다. 한참 뒤 동자가 다시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처녀는 재빠르게 동자를 덮치
암헌(巖軒) 신장(申檣)선생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많다. 쉽게 말하면 국보 1호 숭례문(崇禮門)의 편액 글씨를 썼던 조선시대 명필이며 조선 초기 3정승을 지낸 신숙주의 아버지라고 말하면 쉽게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때는 1392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의 유신 72인이 두문동에 들어가 문을 세우고 빗장을 걸고 은둔하였는데 이중에는 수은 김충한과 순은 신덕린, 그의 아들 호촌 신포시도 72인에 속한다. 신포시는 아버지 순은공을 따라 수은공의 외가인 남원부 호촌으로 귀향할 때 함께 내려와 이웃하며 소두곡에 살았는데 순은공과 수은공은 막역지간으로 허물이 없이 지냈고 이러한 관계로 수은공은 신포시를 사위로 맞이하게 된다. 신포시는 경주김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3남 4녀 두었는데 첫째가 바로 암헌 신장이다. 1382년 태어난 신장은 지금의 남원시 송동면 두신리 소두곡 마을이며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 까지 학문에 정진하였는데 학문의 깊이가 매우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장의 아들 신숙주가 쓴 「암헌서첩후기」에 보면 『공이 13세 때 향교에 갔는데 마침 전라감사가 남원부에 행차해 유생들을 상대로 경의시험을 치렀다. 이 자리에서 공이 종횡무진한 필세로
조선시대 하마비(下馬碑)가 있는 곳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예를 갖춰야 한다. 그래서하마비는 대부분 궁궐, 종묘, 성인 등의 사당이나 묘소앞에 세워졌고 문무와 충의 성현들을 존경의 대상으로삼았던 조상들이 어떻게 예를 갖추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성을 갖는다. 1413년 태종 13년 예조의 건의에 의해 처음에 나무로제작되었고 이후에는 석비로 세웠는데 전면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글씨를 새겼다. 여기서인(人)과 원(員)은 모두 사람을 지칭하며 지위에 따라1품 이하는 궐문으로부터 10보, 3품 이하는 20보, 7품이하는 30보 거리를 두고 내려야 하는 규율이 있었다. 남원에는 4기의 하마비가 있는데 공자의 위패를 비롯해 중국의 성인과 우리나라 동국 18현을 배향하고 있는 남원향교와 운봉향교 입구에 세워져 있다. 남원향교 하마비 전면에서 ‘大小人員皆下馬’이라 각자되어 있고 뒷면에 ‘庚辰正月日’이라 새겼다. 남원향교가창건된 것은 1410년 경인년이다. 따라서 본래의 하마비가 아닌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남원향교가 여러 차례 옮겨졌고 또 정유재란 때 소실되는 등 수난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