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작은 나라 한국의 남부에는 오래된 고을이 있다. 남원이다. 그 고을의 나이는 자그마치 1260살이다. 조선시대 중엽까지 여타한 고을들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던 남원 고을을 세상으로 크게 나아가게 한 사건은 동편제의 출현이었다. 남원식 고을마케팅의 마중물이던 소리판은 조선의 놀이판이었고 그곳에서는 춘향, 흥부 같은 남원의 이야기가 쏟아졌다. 이후 남원은 조선 사람들이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되었고, 광한루는 맨 먼저의 대상이었다. 남원 사람들은 그 광한루에 사농공사, 남녀노소, 동서남북의 조선 사람들이 꿈꾸던 유토피아를 담았고 꿈을 가지게 했다. 그 꿈은 지금도 꾸어지고 있고, 모든 이의 가슴에서 자라고 있다. 조선식 고을마케팅으로 대박 난 남원의 동편제는 그 유통망이었다. 남원이라는 정체성의 이름을 가진 1260년의 연대기 동안 광한루는 남원사람들의 결집체였고 조선 사람들의 융합체였다. 동편제 판소리를 통해 조선팔도의 구석구석에서 펼쳐진 남원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소통체였기 때문이었다. 그 실체는 남원이지만 지금세대 모두의 문화유전자다. 우리는 향토의 자치 시대에 살고 있다. 자기 주변 십리안의 것만 제대로 알아도 향토인이다. 고을의 향토문화가 앞과 뒤
김용근 1961년생으로 남원시에 근무하고 있다. 30여년동안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 1인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 며 국사편찬위원회지역사료조사위원, 지리산둘레길자문위원, 지리산문화해설사, 농어촌퍼실리테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폐허가 될 줄 알면서도 절터를 내어 준곳이 지리산 남원에 있고 그곳은 지리산남원 고기리에 있었던 파근사다. 파근사에 관한 기록은 '난중 잡록'과 '동국여지승람' 그리고 경기도 화성 용주사(龍珠寺)의 아미타여래상에 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 외에도 파근사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가졌다. 고려 중엽 지리산을 유랑하며 도를 닦던노승 한분이 정령치 아래 깊은 골짜기를지나다가 등에 메었던 바랑을 내려놓고,목을 적시려고 물을 찾았다. 마침 근처에 물이 졸졸 흘러나오는 샘이있었다. 노승이 고개를 숙여 샘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려는 순간, 물이 갑자기 말라 버렸다. 이상하게 생각한 노승은 잠시 좌정을 하고 염불을 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샘에서 물이 펑펑솟아 나왔는데 쌀뜨물이었다. 그런데 노승의 꿈에 부처님께서 이르기를 백천수(白泉水)의 샘이 파괴되면 절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노승은 그곳에다 절을 짓고 이름을 파근사라 지었고,
김용근 1961년생으로 남원시에 근무하고 있다. 30여년동안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 1인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지역사료조사위원, 지리산둘레길자문위원, 지리산문화해설사, 농어촌퍼실리테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지리산은 자급형의 생태환경을 가진마을을 내었다. 사람들은 자연과의 순환형 디자인을구축하고 그 속에서 자연의 구성원으로존재했다. 지리산 마을 사람들에게 가뭄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체들과함께 고통이었다. 그러나 1년 농사의 기후를 예측한다는것은 인간의 한계였다. 그래서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그 현상 중에 가뭄을 예고해 주는 것을 오랜경험으로 알아내어 활용했다. 마을 뒷동산에는 어린이 놀이터가 될만한 큰 무덤과 잔디를 두고 그곳에 할미꽃을 심었다. 그 할미꽃이 마을을 바라보며 고개를숙이지 않고 하늘을 쳐다보며 늙어 가면그해는 가뭄이 들었다. 해마다 이맘때쯤 그 현상을 관찰하고 그러한 징후가 나타나면 가뭄에 강한 작물을 심고 저수지에 물을 많이 담았다. 뒷동산 무덤가 할미꽃은 지리산 기상대 마을 예보관이었다. 지리산과 사람은 한 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