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공설 시장 부근에 가면 고샘 골목이 있다. 이 골목에 막걸리 집이 많아 막걸리 골목이라고도 불리지만 그것은 근대이후의 일이고 이곳에 오래된 샘 즉 고샘이 있어서 그렇게 불려져 왔다. 남원 고샘은 남원 사람들의 역사와 함께한다. 고샘은 크기도 했지만 수질과 수량이 남원 도시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고 남원 사람들은 그 샘물에 남다른 문화적 유전자를 키워냈다. 그 고샘의 원명은 대모천이다. 대모천이란 어머니의 마르지 않은 젖줄이 자식을 길러내듯이 이곳의 샘물이 남원 백성의 삶을 이어주는 큰 어머니 같은 물이 내어 준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대모천(大母泉)은 남원스타일의 이야기를 가졌다.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광한루가 생겨나기 전의 남원에는 대모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의 공설 시장 고샘 골목에 커다란 돌이 있었고, 그 돌 밑으로 맑고 달콤한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어 사람들은 그 샘을 대모천이라 불렀고 그 바위의 형상이 큰어미 같다는 데서도 대모상의 이름은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맑고 달콤한 물이 솟아나는 대모천에는 천 년도 더 되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었다. 지금의 이름 고샘(古泉)이 가졌던 오래된 대모천의 이야기는, 정유재란과 함께 역사 속으
우리 조상들은 조선팔도를 금수강산 살기 좋은 땅이라고 했다. 어느 한곳 사람 살지 못할 곳이 없으니, 조선은 천국의 땅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정감록이라고 부르는 책에서는, 조선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열 군데를 지목했다. 이른바 십승지지가 그것이다. 그 십승지지 중에, 지리산의 운봉이 있다. 정감록에 표시된 십승지는 상도 풍기의 차암 금계촌, 화산소령의 옛 땅인 청양 현으로 경상도 동쪽마을, 충청도 보은의 속리산 네 시루목이 연결된 곳, 전라도 남원의 운봉행촌, 경상도 예천의 금당실, 충청도 공주의 계룡산 유구마곡의 두 물길 사이, 강원도 영월의 정동쪽 상류, 전라도 무주의 무봉산 동쪽 동방산동, 전라도 부안의 금바위 아래, 경상도 합천의 가야산 만수동을 이른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들 십승지지의 땅이 예로부터 질병이 없고, 흉년이 들지 않으며, 전쟁이나 범죄가 적거나 없어서, 사람살기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한 지리산 운봉이 왜 십승지에 들어 있을까? 지리산 운봉은 가야로부터 삼국, 그리고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요충지였고, 고원지대의 특성으로 냉해가 심해서 농사가 잘되지 않았던 곳이었다. 이것만으로는 십승지의
지리산 남원 정령치는 낙동강과, 섬진강의 수분계를 가진다. 정령치에서 발원되는 물은 경상도 낙동강을 따르고, 또 한 줄기는 전라도 섬진강을 따른다. 물은 지역을 가르고 강을 만들기도 하지만, 용을 길러 낸다. 먼 옛날 지리산에 용이 열한 마리 내려와 살았다. 하늘을 날던 용 열 한마리가 각자의 삶터를 찾아다니다가 지리산을 지나게 되었다. 한 마리는 달궁에 내려앉았고, 나머지 열 마리는 용궁 마을에 내려서 터를 잡고 살았다. 달궁은 정령치에서 발원되는 상서로운 물이 연중 마르지 않고 내려오는 곳이었고 용궁은 정령치의 기운을 가진 영제봉에서 발원되는 상서로운 물이 사시사철 흐른 곳이었기에 용들이 터를 잡은 곳이다. 정령치를 담벼락으로 삼아 이웃하던 용들은, 훗날 달궁에 왕이 사는 궁터를 내었고, 또 한편에서는 구룡계곡과 용담사를 내었다. 용궁 마을에 살던 열 마리 용들은, 오랫동안 살던 정들었던 터를 떠나 이제 승천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용궁을 떠나 막 승천을 하려고 날개 짓을 한번 하는 순간, 하늘이 내린 신선이 살던 계곡을 지나게 되었다. 계곡은 신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창조 해낼 수 없는 비경이었다. 가장 앞에서 날던 우두머리용은 계곡의 비경에 감탄하여
상처는 영원하나 아픔은 사라졌다. 일제 강점기 때 송진채취로 생긴 상처를 안고 살아온 소나무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시절 송진채취로 상처 난 소나무가 살고 있다 농촌의 작은 마을에 40호 남짓한 집들처럼 저 소나무들도 40여 그루 쯤 된다. 일제는 저 소나무들에서 송진을 채취하여 연료로 가공하여 전쟁물자로 사용했다. 그때의 상처 난 흔적이 지금도 뚜렷하다. 저 소나무가 그때로부터 100년 가깝게 살아내는 동안 마을사람들은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지금의 우리들인 삼 세대를 너머 왔다. 그러하니 그때의 일이 구전으로 뜸성 거리며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살아있는 소나무에서 피를 뽑는 일을 해야 했던 할아버지 세대들의 마음 고통을 치유해내는 것은 할머니들뿐이었다. 명절날 그 소나무 밑에 작은 고사상을 올려주는 것이 전부이어야 했던 그 일마저도 이제는 화석 된 이야기일 뿐이다. 저 소나무의 상처는 영원하나 나라와 국민이 받아야 했던 고통은 기억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지리산에는 일제가 남긴 상처의 흔적이 많다. 그중에서 남원은 일본과 수많은 크고 작은 전투의 역사가 존재한다. 멀리 고려 때의 운봉 황산대첩, 조선의 남원성 전투, 그리고 근대 일제강점기 자원수탈의 현장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