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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권 칼럼] 핏빛 연대기 위에 새겨야 할 평화의 이름

전쟁은 반복되는 인간의 선택인가, 피할 수 없는 구조인가
핏빛 역사 속에서 다시 묻는 평화의 조건
이성으로 해부해야만 보이는 전쟁의 본질

 

핏빛 연대기 위에 각인된 평화의 비문: 전쟁, 그 야만의 궤적과 이성의 응시

30년 전, 대학 강단의 공기 속을 떠돌다 빛바랜 노트 위에 정박했던 '전쟁론'의 묵직한 활자들은, 오늘날 섬뜩하리만치 생생한 현실의 비명으로 되살아나 우리의 양심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인류는 끝없이 이성의 진보와 문명의 승리를 찬양해 왔고, 하늘에는 인공위성이 별처럼 떠 있으며, 손끝으로는 전 지구적 연결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창밖의 세계는 여전히 참호 속의 진흙탕과 핏빛 야만의 변주곡을 반복하는 중입니다. 고도화된 기술은 인간을 폭력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이 아니라, 살육의 도구를 더욱 정교하고 무감각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지금 중동의 붉은 모래바람 속에서 벌어지는 참상은 결코 신의 이름을 빌린 낭만적인 서사시나 선과 악의 명징한 성전(聖戰)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의 질서를 자신의 손아귀에 쥐려는 미국의 신패권주의라는 차가운 강철과, 교리의 절대성을 수호하려는 이란의 신정정치라는 맹목적 불꽃이 정면으로 충돌한 철저한 힘의 수라장입니다. 짙은 화약 연기 너머로 최후의 승전보를 울릴 자는 누구인지 역사는 아직 침묵하고 있으나, 이 무자비한 충돌이 빚어낸 서늘한 경제 침체의 그림자, 그리고 무고한 이들의 흘린 피만이 전 세계의 내일을 무겁게 옥죄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합니다.

 

동유럽의 얼어붙은 대지 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치르고 있는 참혹한 소모전 역시 그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영토와 민족이라는 낡고 색바랜 깃발 아래, 지정학적 우위와 경제적 이권이 교묘하게 얽힌 이 비극 속에서 어떤 이들은 타인의 피를 거름 삼아 은화를 챙기는 자본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라는 거대한 기어에 짓눌린 당사자들은, 언제 동이 틀지 모르는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매일 같이 생살이 찢기고 일상이 무너지는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고 있습니다.

 

30년이라는 긴 침묵의 시간을 깨고, 과거의 강의록을 오늘 다시 새로운 활자로 벼려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전쟁이란 스스로의 폭력을 합리화하는 지독한 개념 조작의 산물이며, 지배자들의 이권과 탐욕이 빚어낸 파국임을 서늘한 이성으로 직시하기 위함입니다. 현재 진행형인 이 끔찍한 잿더미 위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평화의 도덕적 가치를 처절하게 되새겨야 합니다. 평화는 결코 백지수표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차가운 이성과 멈추지 않는 성찰 속에서만 힘겹게 구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앓는 소리가 깊어질수록, 비극을 넘어서고자 하는 우리 안의 '전쟁론'은 더욱 치열하게 깨어나야만 합니다.

 

야만과 숭고의 아슬아슬한 경계: 전쟁을 응시하는 인간의 다면경

인류의 요람을 흔든 것은 역설적이게도 늘 쇳소리와 피비린내였습니다. 문명의 희미한 여명이 밝아오던 순간부터 거대한 마천루가 숲을 이루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내디딘 모든 발자국에는 짙고도 서늘한 무력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밤낮으로 평화를 갈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서늘한 칼날을 벼려왔고, 생명의 고귀함을 찬양하는 입술로 살육의 교리를 암송해 온 모순의 존재입니다.

 

이러한 기괴한 심연을 직시하기 위해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해서 수행되는 정치(정책)의 연장에 불과하다”라는 차갑고도 예리한 언어로 그 본질을 꿰뚫었습니다. 전쟁은 맹목적인 야만의 폭주나 이성의 마비가 아니라, 인간의 냉혹한 이성과 집단의 욕망이 기괴하게 뒤엉킨 극단적 형태의 정치 행위임을 선고한 것입니다. 시대의 강물이 흐르며 전쟁의 무대는 주권 국가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섰고, 안전보장체제나 정치 단체 등 다양한 주체들이 명분이라는 옷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유기체로 진화했습니다.

 

역사라는 거대한 극장 속에서 위대한 지성들은 저마다의 프리즘으로 이 괴물을 관찰해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에게 전쟁은 결코 찬미 받을 수 없는 오점이었으며, 오직 도덕적 가치의 최정점인 '평화'를 지키기 위한 비극적 차악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로마의 베게티우스(Vegetius)는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먼저 알고 이해하라"는 서늘한 경구를 남겼습니다. 평화는 신의 은총이 아니라, 날 선 긴장과 철저한 힘의 균형 위에서만 피어나는 아슬아슬한 꽃이라는 현실주의적 통각입니다.

 

근대의 여명 속에서 도이치(Deutsch)는 전쟁을 언젠가 도려내야 할 '인류의 병마'로 취급하면서도 그 병을 치유하기 위해 깊이 해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라데츠키(Radetzky)는 전쟁을 차가운 과학이 아닌 장엄과 숭고를 품은 '잔혹한 예술'로 묘사하며 핏빛 매혹을 드러냈습니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전쟁에선 단 한 번 죽으면 되지만, 정치에선 여러 번 희생해야 한다"며 정치와 전쟁의 샴쌍둥이적 면모를 조롱한 반면, 몰트케(Moltke)는 전쟁이 세계의 물질주의적 타락을 막는 구원이라며 기괴한 찬가를 불렀습니다. 이토록 다양한 시선은 결국 전쟁이라는 개념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자기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한 눈물겨운 개념 조작의 산물"임을 아프게 증명합니다.

 

파멸을 잉태하는 세계의 불협화음: 무력은 왜 깨어나는가

우리가 이 피의 제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시대의 이념과 렌즈에 따라 달라집니다. 고전적 전쟁관이 이를 국제관계의 건조한 물리적 충돌로 보았다면,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거대한 계급 투쟁의 핏빛 투영으로, 평화주의자들은 야만의 구토물로, 평화연구가들은 궤도를 이탈한 별의 충돌 같은 기형적 이변으로 간주합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처참한 살육극의 막은 도대체 왜 오르는 것일까요? 역사는 세 가지 사상적 렌즈를 통해 그 단서를 쥐여줍니다.

 

* 현실주의(보수주의)의 렌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들은 인간과 국가의 심연에 똬리를 튼 원초적 공격성을 응시합니다. 토머스 홉스의 통찰처럼, 국제 사회는 질서의 채찍을 쥔 절대 권력이 부재한 적막한 정글입니다. 세력의 저울이 기우는 순간, 혹은 국가라는 거대한 방파제에 금이 가는 찰나, 전쟁은 자연재해처럼 해일이 되어 모든 것을 집어삼킵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곧 타인에 대한 위협으로 번지는 안보 딜레마의 비극입니다.

 

* 자유주의의 렌즈, 이상과 현실의 뼈아픈 마찰: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체제와 구조, 인간의 이성에서 답을 찾습니다. 이성적인 민주주의 국가들이 거미줄처럼 자유무역으로 얽히면 상호 의존성이 높아져 평화의 안식이 찾아올 것이라 노래합니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완벽한 자유와 공정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파열음, 혹은 보편적 인권과 가치를 지키겠다는 숭고한 고집이 도리어 '더 거대한 전쟁의 모험'이라는 불길을 불러일으키고 마는 모순을 낳습니다.

 

* 급진주의(마르크스주의)의 렌즈, 자본이 흘린 독기 어린 핏물: 이들은 전쟁의 진짜 얼굴이 자본주의라는 탐욕스러운 기계의 내부에 있다고 봅니다. 전쟁은 사유재산이라는 욕망의 부산물이자, 팽창을 멈출 수 없는 자본이 만들어낸 제국주의, 내셔널리즘, 인종주의라는 독버섯들이 모여 터뜨리는 거대한 종기입니다. 노동자 계급의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정통이론과, 깨어있는 연대를 통해 파국을 막을 수 있다는 수정주의의 시각이 교차하며 체제의 모순을 고발합니다.

 

분규의 불씨에서 파멸의 무도(舞踏)로: 전쟁의 생애 주기

전쟁이라는 이 끔찍한 병리 현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 환부를 낱낱이 쪼개어 보는 서늘한 메스가 필요합니다. 퀸시 라이트(Q. Wright)는 그의 저서 『전쟁의 연구』에서 네 갈래의 해부학적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인간 내면의 꿈틀거리는 광기와 두려움을 좇는 심리학적 접근, 폭력을 통제된 도구로 다루려는 기술적·전문적 접근, 침략의 죄와 벌, 법적 정당성을 저울질하는 이데올로기적 접근, 그리고 폭력이 제도의 옷을 입고 집단 간의 갈등으로 발현되는 과정을 쫓는 사회학적 접근이 그것입니다. 전쟁은 단일한 바이러스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모든 신경망과 혈관이 얽혀 일으키는 거대한 문명적 발작인 것입니다.

 

여기에 피티림 소로킨(Pitirim A. Sorokin)의 '전쟁변동론(Fluctuation of War)'은 평화의 숲이 어떻게 잿더미로 변해가는지 그 비극적인 안무(choreography)를 서사적으로 펼쳐 보입니다. 어제의 이웃이 하루아침에 적의로 뭉친 군대로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일상의 사소한 '분규'라는 작은 불씨에서 시작되어, 은밀하게 불신과 증오의 '소인'을 틔웁니다. 임계점을 넘은 억눌린 갈등이 마침내 제방을 무너뜨리고 공공연한 '폭력 사태'로 분출될 때, 세계는 결국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채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전쟁 상태'라는 파멸의 소용돌이 속으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갑니다. 이것이 역사가 수천 년간 반복해 온 파멸의 메커니즘입니다.

 

폐허 위에 짓는 평화의 건축학, 전쟁론

결론적으로, 우리가 낡은 노트를 펼쳐 '전쟁론'을 논하는 것은 결코 적의 숨통을 효율적으로 끊고 타인의 영토를 유린하기 위한 피 묻은 지침서를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전쟁론은 인간의 정신과 사회, 정치와 경제의 가장 어두운 밑바닥을 긁어모아 기어코 빛을 향해 나아가려는 고독하고도 고도의 '실천적 종합과학'입니다.

 

우리가 문학의 은유와 역사의 통각을 빌려 이 참혹한 야만의 민낯을 직시하고, 그 발병의 궤적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이유는 단 하나에 수렴합니다. 그것은 "거시적이고 이상적인 인간들의 평화로운 삶의 터전을 구축해 내기 위한 뼈아픈 논리의 결실"을 맺기 위함입니다. 질병을 알아야 백신을 만들 수 있듯, 전쟁의 해부도를 완벽히 숙지해야만 평화의 설계도를 그릴 수 있습니다.

 

문화사가들이 역사를 단순한 권력과 왕조의 교체기가 아닌 인간 정신의 찬란한 발로로 읽어냈듯, 전쟁 역시 우리 내면에 숨겨진 가장 어둡고 서글픈 정신의 발현입니다. 그렇기에 포연이 가라앉은 핏빛 칼날 위에 우리가 떨리는 손으로 새겨 넣어야 할 비문은, 오만한 승자의 찬가가 아니라 평화에 대한 처절하고도 간절한 진혼곡이어야 합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심연을 철저히 해부하고, 그 야만성을 두려워할 줄 아는 차가운 이성만이 맹목적인 파괴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습니다. 30년 전의 강의실에서, 그리고 여전히 포탄이 떨어지는 오늘의 세계에서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진리는 이것입니다. 과거의 피비린내 나는 교훈을 거름 삼아, 우리는 오늘도 이 거대한 '전쟁론'이라는 지적 유산 속에서 야만을 넘어설 눈부신 연금술을 계속해서 갈고닦아야만 합니다. 폐허 위에 진정한 평화의 성채를 쌓아 올리는 그날까지, 이성의 응시는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빛나사역사연구소 소장 

김준권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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