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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뿌연 연기처럼 창 너머로 보이는 산은 산이 아니요, 가려진 거대한 군함 같다. 남공회 정기총회 “고향발전에 힘 모으자”
도시에 뿌려지는 미세먼지가 흡사 바다의 짙은 안개처럼 내 시야에 흩어져 있다.
불현 듯 떠오르는 고향산천. ◈ 고향에 보내는 편지
지금 내가 있는 이 공간보다 오래전 그곳은 꾀나 맑고 순수했던 것 같다.
나는 작년 9월 30일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고향하면 그리운 이들이 많이도 생각나겠지만, 그중에서 ‘어머니’라는 단어는 누구랄 것 없이 다 그리움처럼 떠오를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지만(아마 처녀 때부터였을 것이다) 손기술 하나로 미장원 일을 하셨다. 지금은 헤어샵, 머리방이라고 그럴싸하게 좋은 상호로 불리지만, 내가 알고 있는 정다운 이름은 그냥 미장원이었다.
어머니는 미장원 일을 육십이 넘어서까지 하셨다. 거의 40년을 한 가지 일만 꾸준히 하신 것 같다.
미장원은 내가 유년시절, 학창시절을 모두 보냈던 곳이다. 동문사거리 양지미장원.
어머니는 가위와 씨름하며 그 독한 파마약과 친구하며 그곳에서 나를, 그리고 우리를 키우셨다.
그 덕분에 나와 형, 그리고 두 누님은 물질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지금껏 살아왔다. 은혜가 하늘과 같다.
하지만 인간은 풍요 속에서도 빈곤을 느낀다고 하지 않는가.
한때는 어머니가 나에게 더 많이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불평도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아마도 어머니가 가진 전부였을 텐데도 말이다.
후회가 밀려온다. 주고 싶은 것, 그리고 그 이상을 나에게 주셨던 그 마음이 서럽게 다가온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머니의 마음은 다 똑같은 것 같다.
살아생전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물으면 매번 제일 먼저 하시는 말씀이 “밥 먹었냐”다.
그러면 나는 똑같은 대답으로 “요즘 밥 못 먹고 사는 사람 어디 있냐”며 반문을 하곤 했다. 그리고 뒤이어서 들려오는 레퍼토리는 “직장 상사에게 잘하고, 네가 먼저 인사하고, 다른 사람에게 조금 손해 보며 살고, 출 퇴근할 때 운전 조심하고, 하나님 잘 믿고, 아이들 잘 키워라”로 끝난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은 그 모든 말씀이 그립다.
다시한번 나에게 예전처럼 그 목소리를 들려주실 수는 없을까. 비록 그때는 투덜댔지만 지금은 그 목소리 하나하나가 너무나 그리울 것 같다.
올해도 어김없이 9월은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때 또 다시 나는 고향을 그리워 할 것 같다. 어머니의 삶과 우리 형제들의 추억이 남겨진 그 곳을. 향우회 세대교체 해법…고향과의 추억 공유